밀레 <만종>, 윌리엄 호가스 <그레이엄 집안의 아이들 초상화>, 에드가르드가 <무대 위의 무용수>, 피터르 브뤼헐 <교수대 위의 까치>,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 2013년 즈음 작성한 글입니다.
01. 밀레의 <만종>
첫번째로 소개하는 명화는 <이삭줍기>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밀레의 <만종>이다. <만종>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 일을 마친 농부 부부가 교회종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는 평화로운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알고 있지만 이 그림에는 슬픈 사연이 숨어 있다. 손을 모아 기도를 하고 있는 농민 부부의 바구니를 살펴보길 바란다. 그림에서는 수확한 감자들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사실 저 자리에는 아기 시체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밀레가 <만종>을 그릴 당시 배고픔으로 굶어 죽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그림 속 부부의 아기도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것. <만종>은 그렇게 죽은 아이를 바라보며 애도하는 부부를 그린 그림이다. 바구니 자리에 원래 그려져 있었던 것이 '관'이었다는 설도 있고, '아이 시체가 담긴 바구니'라는 설도 있는데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기의 시체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큰 흉년이 들었던 해, 농부 가족은 굶주림에 시달리며 봄이 오기를 기다렸다. 따뜻한 봄이 오면 씨감자를 심어 배고픔에서 벗어나리라 한가닥 희망을 가슴에 품은 채, 춥고 긴 겨울을 고통 속에서 보냈다. 그런데 봄이 오기도 전 사랑하는 아이가 배고픔에 지쳐 그만 죽고 말았다. 너무 가난했기에 관을 살 돈조차 없었나 보다. 부부는 감자를 담는 바구니에 죽은 아이의 시체를 담고 땅에 묻에 주려고 나온 것이다."
"큰 흉년이 들었던 해, 농부 가족은 굶주림에 시달리며 봄이 오기를 기다렸다. 따뜻한 봄이 오면 씨감자를 심어 배고픔에서 벗어나리라 한가닥 희망을 가슴에 품은 채, 춥고 긴 겨울을 고통 속에서 보냈다. 그런데 봄이 오기도 전 사랑하는 아이가 배고픔에 지쳐 그만 죽고 말았다. 너무 가난했기에 관을 살 돈조차 없었나 보다. 부부는 감자를 담는 바구니에 죽은 아이의 시체를 담고 땅에 묻에 주려고 나온 것이다." |
감자 바구니에 아이의 시체가 그려져 있었던 원래 그림은 밀레의 친구가 보고는 너무 잔인하다고 충고했고, 이에 밀레는 아기 위에 감자를 덧칠해 그렸다고 한다. 실제로 <만종>을 X-ray로 촬영해 보면 바구니 자리에 죽은 아기의 시체 그림이 나타난다. 사랑하는 아이를 공동묘지에 묻을 돈조차 없어 밭 귀퉁이에 묻어야만 하는 부모의 심정은 얼마나 비참했을까.
서양사람들은 사람이 죽었을 때 목사를 불러 애도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왜 그림엔 목사가 안보이는걸까? 아마 부부는 최하층 천민에, 끔찍한 가난을 겪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아마 밭도 그 농부 부부의 소유가 아니었을 것이다.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남의 밭 한귀퉁이에 밭주인 몰래 아이를 묻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02. 윌리엄 호가스 <그레이엄가의 아이들>
당대 사회를 풍자하는 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화가 '윌리엄 호가스'. 그림 속에는 당시 그레이엄 집안의 아이들 2남2녀가 있는데 수줍은 듯 웃고 있는 두 자매, 의자에 앉아 새장속의 새를 올려다보며 음악상자를 연주하던 장남, 유모차에 앉아 있는 막내 등 4명의 아이들이 보인다. 그러나 사실, 그림 왼쪽의 유모차를 타고 있는 막내는 드레스를 입고 있어 여자아이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사내 아이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남자 아이들도 여자 아이 옷을 입혀 키웠다. 그 이유는 남아의 사망률이 여아에 비해 월등히 높았기 때문. 그래서 남자 아이를 여자아이로 보이게 하면 죽음을 피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림 속 아이들 중 가장 어린 막내 '토마스'는 이 그림이 완성된 후 며칠 뒤 사망했다." |
몇몇 분석가들은 이 그림을 보고 그림 속에 아이의 죽음이 예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 증거로는 (동그라미 표시 참조)
① 커다란 낫을 들고 있는 천사상 : 사투르누스의 지물이자 죽음의 도구 낫(죽음을 상징)
② 두 눈을 번뜩이며 새장을 바라보고 있는 고양이 : 마치 새장속의 새를 노리는 눈빛
③ 새장 속의 새: 고양이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낀 듯 날개를 파닥거리는 새
④ 토마스가 앉아 있는 유모차 : 유난히 눈에 띄는 새 장식(날개를 파닥거리는 새'는 영혼이 육체를 빠져나가는 것을 의미)
윌리엄 호가스는 그 죽음을 예견했던 것일까?
03. 에드가 드가 <무대 위의 무희>
발레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에드가 드가'의 대표작중 하나이다. 1877년 제3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하여 비평가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은 이 작품은 발레 공연장의 분위기와 발레 리나의 아름다움을 간결한 표현만으로 화폭에 생생히 재현해냈다. 그러나 아름다운 발레리나를 그린 이 작품 속에는 당시 어두웠던 사회의 단면이 숨겨져 있다.
"발레에 대한 평가가 낮았던 19세기 후반, 긴 드레스로 다리를 가리고 다녔던 당시 여인들은 다리를 드러내놓고 춤을 추는 무용수들을 경박한 존재로 취급했다.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로 인해 무용수들은 생계에 어려움이 많아 후원자들의 경제적인 지원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
발레리나 뒤쪽의 얼굴이 가려진 검은 양복 차림의 신사는 바로 그녀의 후원자다. 여기서 '후원자'란 요즘 말하는 일종의 '스폰서'의 개념과 같다. 생활이 어려웠던 그림 속 발레리나는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신사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고 일종의 대가(?)를 치르는 관계였던 것이다. 단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프리마 발레리나와 한 덩이의 색점으로 묻혀 버린 다른 수많은 무용수들을 비교하며 화려한 무대 이면에 가려진 무희들의 희로애락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만 소개되는 이 작품의 이면에는 이렇게 어두웠던 당시 시대상이 담겨 있다.
04. 피터르 브뤼헐 <교수대 위의 까치>
영국 농민화가 '피터르 브뤼헐'은 1568년 목가적인 전원풍경을 담은 그림 <교수대 위의 까치>를 완성한다. 이 그림은 사람들이 춤을 추고, 이에 함께 하려는 사람들이 줄줄이 올라오는 그저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골마을이 전면에 펼쳐져 있다. 다만 그러한 풍경 한가운데에 교수대가 서 있고 그 위에 까치한 마리가 앉아있는 모습이 보는 이의 마음을 다소 불편하게 하고 있다.
까치는 우리나라에서는 길조로 여기지만 유럽에서는 그렇지 않다. 흑과 백이라는 색의 조합이 '죽음과 삶'이라는 이중성을 드러내며 '위선'을 뜻하기도 하고, 마녀나 악마의 새라고 불리기도 했다. 또한 잡식성인 까치는 곡류나 곤충 외에 작은 쥐나 새까지 잡아먹고 반짝이는 물건을 좋아해서 은수저나 반지 같은 물건을 둥지로 가져가는 습성 때문에 '도둑'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또 시끄럽게 우는 소리로 인해 '수다쟁이'나 '밀고자'를 비유하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1567년, 네덜란드 새 총독으로 부임한 '알바 공작'은 가혹한 탄압 정치를 하기로 유명했다. 1568년에는 네덜란드의 두 귀족을 공개처형 했는데, 그 이유로는 그들이 알바 공작을 음해하려했다는 누군가의 밀고 때문. 하지만 처형이 예정된 그들에게 그런 계획은 전혀 없었다. 알바 공작이 공포정치를 강화하기 위해 밀고를 조작했던 것이다. 밀고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먼저 밀고를 했던 당시 풍토, 이때 처형 장면을 목격한 후 분노에 휩싸인 브뤼헐은 밀고를 조장하는 알바 공작을 꼬집기 위한 그림 제작하였다. 밀고자를 의미하는 까치가 지켜보고 있는 한 가운데 처형 장소로 올라오는 사람들 함께 춤추지 않으면 밀고를 당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역설적인 방법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
이 작품은 그가 숨을 거두기 바로 전 해에 그려진 것으로, 작품을 통해 날카롭고 신랄한 풍자와 유머, 비유, 상징 등을 보여주었던 브뤼헐의 유작이 되었다. 그는 <교수대 위의 까치>라는 이 의미심장한 작품을 유언으로 남기며 그의 아내에게 이 작품을 제외한 모든 작품을 태워버릴 것을 부탁했다. 아마도 자신의 선동적인 작품이 특정인의 눈에 띄어 아내와 자식들에게 화를 입힐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05.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의 뗏목>
인간이 갖는 극단적인 감정, 즉 기쁨과 환희, 사랑과 애증, 죽음, 고통, 광기, 자살과 연관된 인간행위를 여과없이 표현하는 미술주의가 바로 '낭만주의'이다. 그 선구자로 흔히 프랑스의 '테오도르 제리코'를 들 수 있는데 그의 대표작으로 바로 <메두사의 뗏목>을 꼽는다.
산산조각날 것 같은 뗏목. 뗏목의 오른쪽 아래에는 나무사이에 다리가 끼어 상체가 반쯤 물에 잠긴 시체가 있고, 왼쪽에는 하반신이 뗏목사이로 빠져 물에 잠긴 채 죽어 끌려다니는 시체가 있다. 처참한 죽음이다. 그 시체의 오른쪽에는 삶의 희망을 부르짖는 젊은이들의 외침과는 상관없이 죽은 아들의 시체가 떠내려가지 못하도록 자신의 다리에 올려놓은 채 망연자실한 노인이 있다. 도대체 이 배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프리카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건조된 군함 '메두사'. 루이18세는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5년간 배를 타본 경험이 없는 '쇼마레'를 메두사호의 함장으로 임명한다. 쇼마레가 돈을 주고 함장자리를 매수한 것. 이 미숙한 함장은 항해 시작 2주만에 아프리카 연안에서 메두사호를 좌초시킨다. 귀족 등 상류층 사람들과 함장 쇼마레는 메두사호를 버리고 구명정을 타고 도망쳤다. 탈출하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은 메두사호의 잔해를 엮어 뗏목을 만들어 탈출했는데 폭 9m, 길이 20m의 뗏목에 무려 149명이 승선했다. 무더운 적도의 날씨 속에 마실 것도, 먹을 것도 없는 뗏목의 표류는 15일간 계속되었고, 구조 당시 생존자는 겨우 10명. 갈증과 질병, 익사 등으로 사망자가 속출하고 곧 이어 굶주림과 갈증을 견디지 못하고 남은 생존자들은 서로를 죽여 인육과 인혈을 입에 넣기 시작했다.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이 작고 초라한 공간은 살인과 죽음의 공포로 인해 도덕과 선이 지배하는 인간의 세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
이 사건이 당시 언론을 통해 일제히 보도된 후의 사회적 경악과 충격이 대단했다고 한다. 도망쳤던 쇼마레 함장은 국법회의에 회부됐지만 고작 지위 박탈과 금고 3년형 정도만 내려졌고, 프랑스 정부는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과오를 숨기기 위해 사건을 무마하기에만 급급했다. 이에 분노한 테오도르 제리코는 메두사 호 뗏목 사건의 비극을 알리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뗏목 모형을 제작, 죽어가는 사람들을 표현하기 위해 실제 죽어가는 환자를 스케치하였고, 8개월 동안의 작업하여 사건 발생 3년 후인 1819년 그림을 완성하였다.
정부의 타락과 실책을 비판하는 <메두사의 뗏목> 출품이 불쾌했던 루이18세는 비평가들을 매수해 그림을 마구 혹평하였지만 시민들에게는 큰 인기를 얻은 그림으로 남아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짱공유 미스테리 게시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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