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김광석 자살사건에 관한 미스테리
* 2014년 즈음 작성한 글입니다.
김광석은 대구 대봉동에서 자유당정권시절 교원노조사태로 교단을 떠났던 전직교사 아버지의 3남 2녀중 막내로 1964년 1월 22일에 태어났다. 68년 서울로 올라와 창신동에 살며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76년 경희중학교에 입학, 현악반에 들어간 그는 바이올린, 오보에, 플루트 등 다양한 악기를 배우고 악보 보는 법을 익힌다. 79년 대광고등학교에서는 합창단에서 활동을 한다.
82년 명지대 경영학과에 입학, 1학년때 동아리 '연합메아리'에 가입하여 기타를 튕기며 이런저런 노래를 하고 있을 무렵 한 친구에게서 '젊은예수'라는 운동권 가요집을 선물받게 된다. 그는 그 안에 수록된 '못생긴 얼굴'을 부르다가 그만 울음이 터져버린다. 84년 김민기씨의 '개똥이 음반에 참여. 이때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을 통하여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을 만든다. 85년 1월 군에 입대, 군 생활중 사망한 큰 형으로 인해 6개월 복무하고 그해 7월 제대한다.
군을 마치고 복학 후 노래의 길을 선택, 87년 기독교 기념관에서 열린 노찾사의 첫 경기 공연에 참여해 호소력 가득 부른 '녹두꽃'이란 노래로 관객들을 열광시킨다. 그리고는 단숨에 노찾사의 간판가수로 떠오르고 각종 집회에 단골로 초대된다. 이처럼 투쟁성을 앞세운 민중 노래 운동에 열심히던 그는...
1996년 1월 6일 갑작스레 사망한다.
- 사망추정시각: 1996년 1월 6일 새벽 4시
- 발견장소: 김광석 자택(서울 서교동 한 빌딩 4층 자택의 계단)
- 사인: 자살(전깃줄에 목을 매담)
- 첫 목격자: 아내 서OO씨
당시 서씨는 김광석이 조울증에 시달렸고, 당일 오전까지 술을 마셨으며 서씨가 먼저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사망한 상태였다고 진술했다.
이에 지인들은 故 김광석의 죽음에 대한 3가지 의문점을 제시한다.
1. 김광석이 스스로 목을 맸나
목을 매달 전깃줄을 묶기 위해 쓰였어야 할 의자가 발견되지 않았다. 목을 매달 위치조차 아니라고 설명. "계단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것처럼 해서 발견됐다. 줄이 늘어나야 사람이 서있을 거다. 그런데 전깃줄이 늘어나냐?" 즉 자살할만한 장소가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사건 후 김광석 자택은 내부공사가 이루어져 확인할수 없는 상태였다.
2. 유서가 발견되지 않았다
김광석은 메모광이었다. 김광석 첫째 자형은 "메모가 아주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습관이 되어있다. (자살이라면 틀림없이 유서가 있을 것이다."라고 증언 한다.
3. 김광석은 정말 우울증이 있었을까
음악동호회 지인은 "분명 말씀드릴수있다. 김광석씨가 우울증이 있었으면 내가 몰랐을리가 없다."면서 "적어도 1년동안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다. 라이브 1000 회 공연할 때 매일 봤었고, 그동안 병원가는 걸 본 적이 없다."라고 증언.
“자살할 아이가 아니다" 故 김광석 가족이 말하는 타살의 근거
① 그는 누구보다 삶의 의지와 계획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② 누나들 "광석이는 '부모보다 먼저 가는 자식만큼 불효는 없다'라고 항상 말했다. 그리고 오래 살고 싶다고 했다."
③ 어머니 "활발하고 마음이 약한 아이다. 자살할 아이가 아니다. 착하고 남한테 해코지할 사람도 아니다."
관련기사
이상호 기자가故김광석의 죽음에 타살의혹을 제기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tvN '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 녹화에서 MBC 이상호 기자는 "김광석의 죽음이 모두에게 알려진 것처럼 우울증에 의한 자살이 아닌 타살로 믿고 있다."고 깜짝 발언을 해 눈길을 끌었다. 이어 그는 “100%가 아니면 기사로 쓰지 못한 다.”면서 “1%의 부족함이 있어도 기사화하지 못한다. 그 중 대표적인 사건이 '김광석의 죽음이다."라고 덧붙였다.
김광석은 지난 1996년 1월6일 새벽 서울 서교동 자신의 집 거실에서 목을 매 자살했지만 이날 이상호 기자의 발언에 따르면 사건 당시 김광석의 죽음이 타살로 의심될만한 단서와 용의점이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더불어 이상호 기자는 "모든 변사사건은 타살 의혹을 가지고 수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 사건을 검찰 측에서 재조사할 움직임도 있었고, 관련된 119소방대원의 증언도 있다."
※이상호 기자 <카메라출동>, <시사매거진 2580>, <미디어비평>, <사실은> 등의 프로그램에서 탐사 전문 기자로 일했고, 연예계 노예계약을 처음으로 고발해, 젝스키스, 핑클 등 아이돌 기획사가 표준계약서를 쓰게 했다. 경쟁사인 SBS와 연관된 태영건설의 비리를 캐내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다. 심지어 연예인들에게 PR 비를 받는 자사(MBC) PD들을 고발해서 회사 간부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이후 전두환 비자금 추적보도, 이명박 BBK 김경준 속보, 삼성 X파일 사건 등을 보도하였고, 그 후 왠일인지 MBC 자회사로 강제발령되었다가 결국 MBC에서 해고되었다. 현재 고발뉴스 운영/진행 |
이상호 기자의 의문점
① 관련자들을 거짓말 탐지기로 테스트했는데 진술이 거짓말로 나타났다.
② 기본 사실관계에 대해 조사가 안된 부분이 있다. 당시 사망사건 현장에 있던 사람들에 대한 조사가 안 되어있다. 두루뭉술하게 얘기하면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 중에서 범죄 용의선상에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충분한 조사가 안이뤄졌다. 아예 안 이뤄졌다.
③ 모든 변사사건은 타살 가능성을 두고 조사하는게 맞다. 그런데 당시 현장에 있던 소방관 진술에도 불구하고 그렇게(타살가능성을 염두에 둔 조사가) 안됐다.
저작권 수입 분쟁
2005년 11월, 김광석 부인 서모씨는 시아버지 소유의 음반 저작인접권(가수가 자신이 부른 노래에 대해 갖는 권리)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300만 원의 벌금형을 받고 이 판결에 불복해 항소를 했던 바 있다. 김광석은 죽기 전에 자신의 저작인접권을 아버지에게 양도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광석 사망 후 부인 서씨가 딸과 함께 상속인의 권리를 요구,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 소송이 벌어진다.
김광석 부인과 시아버지 양쪽은 이후 소송을 취하, <김광석 다시부르기> 음반 4장의 저작인접권을 시아버지가 갖는 대신 시아버지가 숨진 뒤에는 모든 권리가 김광석씨 딸에게 양도 된다는 내용의 합의약정을 맺었다. 그러나 서씨는 이를 어기고 2002년 시아버지와 합의없이 자신이 대표로 있는 00뮤직에서 시아버지가 저작인접권을 가진 노래들을 포함 <김광석 마이웨이> 음반을 만든다. 이에 시아버지는 이듬해 소송을 냈으나 재판 진행중 2004년 8월 사망. (전 며느리와 체결했던 합의를 취소하는 유언을 남김) 김광석 어머니와 친형이 소송을 이어받게 되고, 저작권 가족 분쟁은 민형사 재판 등 모두 4차례 법적 분쟁을 벌렸다.
하지만 법적 분쟁에서 마지막 승리는 서씨였다.
가수 故김광석씨의 음반저작권은 김광석 부인과 딸에게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것이다.
세줄 요약
1. 자살할 이유도 증거(유서)도 안나옴.
2. 첫 목격자이자 제일 의심가는 용의자인 서씨(아내)와의 불화. 사후 저작권 싸움. 그리고 법정분쟁 종결 후 바로 미국행.
3. 절대 자살이 아니다. 범인은 존재한다. 그런데 심증은 있으나 증거가 없다.
출처: 짱공유 미스테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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