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5월 19일, 강남구 삼성동 고급주택가에 있던 2층 양옥집에서 화재가 발생한다. 집 안에서 발견된 새카맣게 탄 부부의 시신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목덜미부터 다리까지 온몸에는 난자(亂刺)의 흔적이 가득했다. 이들은 당시 한약방을 운영하며 100억 원대 자산가로 자수성가한 박모씨와 그의 아내 조모씨였다. 첫 신고는 한 집에 살던 큰 아들이 했다. “잠에서 깨 화장실에 가려고 문을 열었더니 불이 나 있었고 급한 마음에 혼자 빠져나왔다, 부모님이 아직 집 안에 계시니 도와달라”는 전화였다.
처음 경찰은 재산을 노린 단순 강도·방화를 의심했다. 그러나 사라진 물건은 없었고 부검 결과 기도와 폐에서 그을음이 발견되지도 않았다. 불이 나기 전 이미 사망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부부는 잔혹하게 살해될 만큼의 원한을 산 적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지냈으며 매주 교회에 나가는 독실한 종교인이었다.

경찰은 여러 정황들로 봐서 면식범의 소행일 것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유력한 용의자로 최초 신고자인 큰 아들 박한상(당시 24세)을 의심하게 된다. 사실 화재 당시에도 소변이 마려워서 잠시 나가다가 불이 나자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먼저 도망가 버린 박한상의 행색이 수상해서 수사 대상에 올랐다. 하지만 지금보다도 유교적이던 당시 관점으로 친아들이 부모를 그렇게(잔인하게) 살해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비록 집안의 문제아였긴 했어도 장례식 때 오열하다가 기절까지 한 친아들을 처음부터 범인으로 생각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거기다 박한상 본인도 당연히 불길 속에 있는 부모님을 구하려고 했지만 불길이 너무 세어 차마 불길 속을 헤치고 부모님을 구할 용기가 안 났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안실을 찾아 실신할 정도로 통곡하던 모습은 잠시뿐이었다. 장례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박한상은 친구에게 전화해 "장례가 끝나자마자 아버지의 사업체를 다 팔아버리고 외국에 나가 장사를 하겠다"며 사업 계획을 거창히 떠벌렸으며, 여자친구와 통화하면서도 대놓고 큭큭거리며 웃는 모습을 보였다. 마치 좋은 일이 생긴 것처럼.
의심은 갔지만 대놓고 추궁할 수 없었다.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었다는 동정의 시선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찰이 참고인 조사를 하려 하자, 일부 가족이 “부모 잃고 정신적으로 충격에 빠진 아이에게 무슨 짓이냐”며 공개적으로 항의하기도 했다. 자식이 부모를 이 정도로 잔인하게 죽인다는 건, 그만큼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증언과 자백
결정적 증언은 사건 발생 직후 박한상을 치료했던 간호사에게서 나왔다. “머리에 피가 보여서 상처가 있나 하고 봤더니 없더라고요.” 그리고 뒤이어 발견된 종아리의 상처. 사람에게 물어 뜯겨 생긴 인교상(人咬傷)이었다. 치열 대조 결과 아버지 박씨의 이빨 자국과 일치했다. 경찰이 이를 근거로 그를 강하게 추궁하자 박한상은 사건 발생 일주일 만에 부모의 재산을 노리고 저지른 범행 일체를 자백하고 그 자리에서 즉시 구속되었다. 미처 닦아내지 못한 부모의 피와 죽어가던 아버지가 남긴 증거로 아들의 죄가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박한상은 범행을 자백하며 “속이 시원하다, 그동안 잠을 못자 힘들었다”고 했다.
괴물이 된 부잣집 아들
박한상은 대형 약재상을 운영하던 부모 덕에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거기에 가부장제의 영향력이 강력하던 시절에 장남으로 태어나 편애 수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자랐다. 강남구의 명문고 현대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이미 어릴 때부터 학업 포기 성향이 짙었고, 성적도 저조했다. 게다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불량한 인격으로 일진들과 어울리며 음주, 흡연은 물론 내기화투와 싸움질, 학폭 등 온갖 비행을 숱하게 저질러 수차례 전학을 다녔는데, 그나마 있는 집 자식이라서 비행을 밥먹듯이 저지르고도 퇴학이 아니라 매번 전학으로 끝날 수 있었다.

전통시장 한약방을 기업체 수준으로 키워낸 아버지는 장남인 한의대에 진학해 가업을 잇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기대와는 달리 그는 한의학에는 관심도 능력도 없었다.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아버지와 진로 문제로 인해 항상 갈등이 잦았다고 한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불량한 인격으로 일진들과 어울리며 음주, 흡연은 물론 내기화투와 싸움질, 학폭 등 온갖 비행을 숱하게 저질러 수차례 전학을 다녔는데, 그나마 있는 집 자식이라서 비행을 밥먹듯이 저지르고도 퇴학이 아니라 매번 전학으로 끝날 수 있었다. 결국 지방 모대학 토목공학과에 입학했으나 역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채 유흥업소나 들락거렸으며 방위병 복무 중에도 저녁에는 차를 몰고 압구정에서 오렌지족 생활을 즐겼다. 그의 아버지는 소집해제 후 복학을 포기한 박한상을 자퇴시키고 미국 L.A. 근교 어학원으로 도피유학을 보낸다. 당연히 유학생활도 엉망이었는데 어느 날 비슷한 처지의 또래 유학생을 만나 호기심에 함께 학교 근처의 도박장에 가게 된 것을 계기로 도박중독에까지 빠지게 된다.

한편 도박으로 3,700만 원(2025년 기준 1억1,000만 원 가량)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도박빚까지 지게 된 그는 도박빚의 변제를 아버지에게 부탁했지만 변제는 커녕 호되게 꾸중만 들었고, 그의 아버지는 더 이상 아들의 방탕하고 막장스런 생활을 두고 봐줄 수 없어 한국으로 아들을 불러들였다. 그동안 모든 사고를 수습해주던 아버지로부터 "넌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놈이야!", "이제 내 아들도 아니니 호적 파서 당장 나가!"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는 와중 정작 차별받고 자란 차남이 비뚤어지기는 커녕 우수한 성적으로 한의대에 입학하면서, 그는 이제 더 이상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대상이 아닌 사고뭉치이자 식충이로 전락해버렸다.
박한상은 자신이 원하는 고급 승용차를 사주지도 않고 자신의 빚도 안 갚아 주면서 꾸중만 했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앙심을 품게 된다.(사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차를 구입할 돈 18,000달러(2025년 기준 약 5,800만 원 가량)를 이미 줬다. 그러나 박한상은 그 돈을 전부 도박에 탕진했다.) 본격적인 살인 계획을 세우고 5월 13일 청계천 인근 상가와 주유소 등지를 돌며 등산용칼, 휘발유 등 살인에 필요한 도구들을 구입한다.
실행
며칠 뒤인 1994년 5월 19일 새벽, 박한상은 속옷까지 다 벗어 버린 알몸으로 몸에 피가 최대한 묻지 않게 하기 위해 침대시트를 뒤집어 쓴 채 미리 구입했던 25cm 길이의 등산용칼을 양손에 하나씩 쥐고 취침중인 부모가 있는 안방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그리고 잠들어 있던 어머니와 아버지를 각각 40여 차례 찔러 잔혹하게 살해한다. 이 와중에 칼에 난자당하던 아버지가 필사적으로 박한상의 발목을 물었는데 이는 후에 박한상이 검거되는 결정적인 증거 중 하나가 된다.
“부모님 피가 묻지 않게 하려고요. 깨시면 저인지 모르게 하려고. 이렇게 몸을 반쯤 숙인 상태였고요. 어머니가 이쪽에 있어서 침대 커버는 놓친 상태였어요. 제 기억으론 오른손으로 처음에 목 부위를 찔렀던 것 같아요. 그냥 막 계속 찔렀어요. 바로 돌아가셨는지는 모르겠고 비명소리는, 안 들렸어요.”

할 일을 마친 박한상은 욕실로 가 샤워기 물을 틀었다. 몸에 튄 부모의 피와 함께 살인의 흔적들이 모두 씻겨나가길 바라면서. 당시 담당 형사는 “화장실에 루미놀(핏자국에 형광색으로 변하는 특수용액)을 뿌렸더니 반짝반짝하는 광채가 엄청나게 났다”고 회상했다.
샤워를 마친 박한상은 준비해둔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그리고 집 밖을 뛰쳐나가 집 근처 공중전화에서 119에 신고를 한다.
당시 집에는 박한상의 가족 외에 이종사촌 동생 12세(초등학교 6학년) 이군이 다른 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이군은 무사히 탈출해서 가벼운 화상만 입었다. 이군은 본인의 부모(박한상의 이모 부부)가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충주 수안보로 여행을 가서 이모집에 맡겨진 상태였다. 한편 박한상의 친동생은 학업 관계로 타지에서 거주 중이었기 때문에 다행히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 박한상은 범행 후 샤워를 해서 몸에 묻은 혈흔을 지웠는데, 머리에는 피가 묻지 않았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머리를 감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에 피가 묻어 있는데 상처가 하나도 없다는 점을 수상히 여긴 간호사가 이를 경찰에 제보한던 것이 결정적인 단서가 되어 사건 발생 엿새 만에 범인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머리를 안 감았던 것이 그의 최대 실수가 된 셈이다.
판결
박한상의 자백에 의하면 처음엔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 생각도 했고 자수할 생각도 해봤으나 두려워서 미수에 그쳤다고 했는데, 천성적으로 인성이 나쁜 것을 넘어 처참한 수준인 걸 생각하면 진지하게 자살이나 자수를 생각했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동정을 사서 감형받아 보려고 한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았다.
저명한 인권변호사가 박한상의 변호를 자처했으나 3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박한상이 "누군가 나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주장을 한 직후 사임했는데, 저 정신 나간 주장 말고도 친구에게 공범 누명을 씌워 수사에 혼선을 주는 등 반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모습에 질려버렸던 듯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동정의 여지가 전혀 없는 패륜아에게 법원은 관대할 이유가 없었다. 1심, 2심 모두 사형 판결이 났으며, 1995년 8월 25일 대법원은 존속살해 등의 혐의로 기소된 그에게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다만 1997년 12월 30일을 마지막으로 국내 사형 집행이 멈추면서 박한상의 삶은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1심 재판을 맡은 부장판사는 선고 공판에서 사형을 선고하며 "(재판부도) 사형을 피할 명분을 찾기 위해 고심했으나, 찾을 수 있는 명분이라곤 고작 피고인의 부모가 살아있을 경우 아들의 사형을 원치 않았을 것이란 추측뿐이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박한상은 사형수의 신분으로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대한민국이 실질적 사형폐지국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일반적인 무기징역은 최소 20년 이상의 형기를 살고 경우에 따라 가석방 심사대상이 되지만, 사형수는 감형받지 않는 이상 절대로 가석방이 불가능하다.
박한상을 만나기 위해 교도소를 찾아온 한 남자가 있었다. 가족을 모두 잃고 홀로 남은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이었다. 박한상은 동생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나는 무죄다.” 그 이후 동생은 형을 두 번 다시 찾지 않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박한상은 원하던 재산을 단 한 푼도 받지 못하게 되었으며, 모두 남동생에게 상속됐다.
30년간 사형수들을 상담해 온 교화위원 고(故) 양순자씨는 박한상의 유일한 면회자였다. 박한상은 6년간 양씨에게 수십 통의 편지를 쓰기도 했는데, 그 안에 담긴 말은 늘 같았다. 범행을 부인했고 억울함을 호소했으며 부모를 탓했다. 양씨는 저서 ‘인생이 묻는다 내가 답한다’에서 박한상을 이렇게 기억했다.
“강남의 또라이 박한상. 그 아이를 더 이상 상담할 수 없어 포기해 버렸다.”
사회에 끼친 영향
안그래도 당시 사회문제였던 '오렌지족'과 '야타족'의 인식이 이 사건으로 인해 더욱 나빠지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랜드에서는 한동안 '오렌지족 출입금지'라고 써붙였을 정도. 또한 박한상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면서 "미국 영화를 보고 살인 수법을 배웠다."라고 내뱉은 말 때문에 수많은 영화는 물론, 애니메이션까지 도매금으로 지탄을 받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박한상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공공의 적>은 2002년 개봉해 흥행에 성공했다. 한편 '유산을 물려주는 게 범죄의 원인'이라는 본질에서 한참 벗어난 생각을 한 사람들이 '유산 안 물려주기 운동'을 벌이기도 하는 등 사회적으로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존속살해는 주로 극심한 정신질환에 시달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의 환자가 끝내 극단적인 사고를 쳐버렸는데 마침 가장 가까이 있던 가족이 그 희생양이 되고 만 경우이거나, 불우한 가정환경이 원인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대다수의 존속살해는 비록 용서하지 못할 무거운 죄이지만 피의자가 사회적으로 동정적인 시선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부유층 가족에서 발생한 사건에, 범인의 도덕성 결여와 반사회적 성격, 부모의 재산을 노린 사건이라는 점에서 다른 존속살해와 상당한 차이점을 보였다. 이로 인해 박한상은 대한민국 최악의 존속살해범을 논할 때 첫번째로 꼽히는 범죄자가 되었으며 이 사건 역시 당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준 '패륜의 대명사'급 사건으로 등극했다.
참고 및 인용
- 박한상 (위키백과)
- 박한상 (나무위키)
- 박한상 존속살해 사건 (나무위키)
- 교화 상담사도 포기했다...부모 잔혹 살해하고 "난 무죄"라는 박한상 (조선일보 2023.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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