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무비 신기주 칼럼 2009년 6월 10일자
최장집 교수는 2006년 6월 10일 초판이 인쇄된 저서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화>의 1부 1장 '한국 민주주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나'를 이런 말씀으로 시작했다. "민주화를 적극적으로 추동했던 사회세력 내부로부터 '민주주의는 여전히 희망의 언어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물음의 근저에는 현실의 민주정치에 대한 강한 회의가 있다." 6공화국의 네 번째 민주정부인 참여정부의 임기도 3년 넘게 지난 무렵이었다. 6공화국을 가능하게 했던 6월 항쟁은 19주기를 맞고 있었다.
그랬다. 민주주의는 이미 공기였다. 물이었다. 대통령은 국민이 대통령인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다. 국민들이 그를 비웃고 조롱해도 웃었다. 그는 청와대 지붕 아래에서 숨어사는 각하가 아니었다. 직업이 대통령인 사람이었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믿음이 곧 민주주의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는 국민이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민주주의다. 몰인정하고 우매하며 감정적이고 즉흥적인데다가 이기적인 국민들과 대화하면서도 대통령은 그 믿음을 버리지 못했다. 불완전했으나 진심어린 민주주의의 시대였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고마운 줄 몰랐다. 오히려 민주주의가 밥을 먹여주냐고 했다. 직장을 잡아주냐고 했다. 그 때 최장집 교수는 실망의 문제를 얘기했다. 그는 "실망(decencanto)은 기대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민주화 이후의 현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갖게 되는 일종의 불만 내지 기대의 좌절에 대한 자각을 의미한다"고 정리했다. 그 때 국민들은 실망했었다. 민주주의보단 경제를 발전시켜주겠다는 약속에 눈이 돌아갔다.
5년 나이 터울이 지는 새로 뽑힌 대통령과 앞선 대통령은 같은 시대를 전혀 다른 명분과 목적으로 살아온 분들이었다. 앞선 대통령에겐 올바로 똑바로 사는 게 중요했다. 새 대통령에겐 남보다 잘 사는 게 중요했다. 두 사람은 건국 60년의 대한민국이 지닌 두 얼굴이었다. 두 사람, 두 가치, 두 이념, 두 집단은 오랜 시간 서로 견제해왔고 마침내 한 사람씩 대통령을 배출했다. 양쪽 이념 집단의 엘리트들은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국민들한테는 애초에 둘은 선과 악도 옳고 그름도 아니었다. 둘 사이엔 우열이 없었다. 그저 앞선 아버지 세대가 선택한 두 가지 상반된 삶의 방식일 뿐이었다. 적어도 22년 전 6월 10일 이한열의 죽음과 국민장을 경험한 적이 없는 세대에겐 분명 그랬다.
하지만 앞선 대통령이 눈을 감으면서 마침내 다음 세대에게도 우열이 생겼다. 앞선 대통령은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 자신이 상징했던 가치를 불멸하게 했다. 다시 민주주의를 그리워하게 됐다. 민주주의 대신 좋은 옷과 좋은 휴대폰을 선택했던 스스로를 부끄러워 하게 됐다. 민주주의는 결코 공기나 물이 아니었다. 먹고 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거였다. 최장집 교수는 1일 <한겨레>에 기고한 칼럼에서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는 7년 전 노무현이 이룩한 일을 성취해낼 또 다른 노무현을 요청하고 있다"고 썼다. 아버지의 죽음은 다음 세대의 마음에 민주주의의 새 씨를 뿌렸다. 운명이다.
6월 10일이다. 6공화국은 실망과 절망과 슬픔을 거쳐 이제 새로운 민주주의로 나아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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