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셜

웃는 얼굴로 사채 권하는 사회

사채 광고의 기이한 화사함에 우울해지다 (매거진t 2006년 10월 26일자)

 

 

어려울 때 힘이 되는 당신의 친구, 사채를 쓰세요.

 

TV만 틀면, 요즘 진종일 같은 광고가 나온다. 옛날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캐릭터들이 “산와 산와 산와 머니~” 하고 돈 꿔가라고 노래 부르는 정도였는데, 어느새부턴가 한채영이 애교스럽게 웃으며 피켓을 들고 벨을 눌렀다. 절대 돈 빌릴 일도 없을 것 같은 삐까뻔쩍 럭셔리한 집에 찾아와서 방긋방긋 웃었다. 사채 쓰라고. 그때만 해도 그러다 말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왠 걸, 어느 채널에나 삐죽삐죽 대출 광고가 고개를 삐죽삐죽 내민다. 이영범이나 최민식 같은 아저씨들은 예의 친근한 얼굴로 믿음직하게 시청자들에게 미소 짓고, 한채영이나 김하늘을 더없이 예쁘게 생글생글 웃는다. 왜? 사채 쓰라고. 매장에서 피자 구워서 배달 오는 것보다 당신한테 급사채 꿔주는 속도가 빛의 속도니 걱정말고 쓰라고, 어려울 때 당신의 친구이니 어서 쓰라고, 에스컬레이터에서 빽빽 소리까지 치면서 사채 쓰라고, 연리 65.7%는 일단 신경 쓰지 말라고.

 


연 65.7%의 이자, 피자보다 빨리 들어오는 사채


사채 광고를 볼 때마다, 몇 번이나 보는 건데도 그 때마다 일일이 멍해지고야 마는 것은 그 기이한 화사함이다. 돈이고 금융이고는 죄다 까막눈인 내가 봐도 돈이 필요한 사람이 일단 제일 먼저 찾아야 할 곳은 은행일 것 정도는 아는데, 연 몇십 퍼센트의 이자를 감수하고 저곳에서 돈을 꿔야 할 사람은 은행에서 돈 못 빌리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면 학생이거나 신용불량자이거나 뭐 그런 식일 텐데, 그런 사람들은 돈을 안 꾸는 것이 이치상 맞다. 그래도 꿔야 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대출자격조회만 해봐도 당장 제 1금융권에서 대출이 전면 거부된다는 곳에서 돈을 빌려야 할 텐데, 연 65.7%의 이자를 감수해 가며 지금 당장 피자보다 빨리 입금해주는 돈이 필요한 사람들은 분명 지금 당장 어려운 일이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당장 사채 끌어다 써야 하는 사람들에게 화사하게 웃으면서 돈 꿔가라고 하는 그 미소, 그 미소가 이상하게 마음을 서늘하게 한다. 물론 너, 돈 필요하지? 빌려 주는 데도 없지? 이자는 더럽게 비싸지만, 아쉬운 대로 우리한테라도 빌리지 그래? 하고 광고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그 미소는, 너무나 어색하게 화사하다.

 


그래, 무엇보다 일단 돈부터 쥐어야지


이 어색함의 이유는 잠깐 뒤에 제쳐 두고, 한채영은 몰라도 김하늘은 좋아했기 때문에 다소 실망이었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김하늘에게 실망한단 말인가. 내 실망 따위 김하늘은 알지도 못할 거고, 뭘 찍든 개인의 자유인데. 그런 사채업 광고는 4-5억 정도의 돈으로, 일반적인 광고에서 A급 스타들이 쥘 수 있는 돈이라니 쪽 좀 팔고 5억이면 당장 내다 팔 만 하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 나라야 이런 나라니까. 믿었던 것은 순식간에 스러지고, 그렇기에 자기가 믿는 무언가를 위해서 오래 싸우는 사람은 없으며, 걸핏하면 이래도 불안하지 않은가, 이래도 불안하지 않은가 하며 멱살만 안 잡았지 온 사회가 을러댄다. 그 몸무게에 잠이 오십니까? 그 쌩얼에 잠이 오십니까? 그 은행 잔고에 잠이 오십니까? 그 연봉에 잠이 오십니까? 그러므로 일단 돈부터 쥐어야 할 나라라고, 우리 모두가 믿고 있으니까.

 


절대로 돈 꿀 일 없을 ‘공인’들이 돈 꾸라고 권하는 순간

 

하지만 그들의 그 미소에 실망하면서, 지금은 너무 촌스럽고 뻔뻔한 말이 되어 버린 ‘공인’이라는 단어를 참으로 오랜만에 떠올렸던 것이다. 공인은 섹스하면 안 된다고(특히 여자 스타는 뭐 수절이라도 하란 말인가) 왈가왈부하는 그 공인 말고, 진짜 공인 말이다. 그 경계가 참으로 애매하긴 하지만 적어도 공인이라 불릴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은 ‘남 덕 본 사람’이다. 남 덕 봐서 그 자리에 올라간 사람, 다른 사람들의 사랑과 지지를 먹고서야 비로소 먹고 사는 사람들, 그래서 정치인과 연예인을 공인이라 부르는 것일진대 사채 광고가 왠 말인가.

 

대가 없이 자신을 예쁘다고 사랑해 준 사람들에게 6개월이든 1년이든 연 65.7%로 돈 꿔가라고 웃는 건 염치 있는 인간은 못 한다. 상식적으로 그렇게라도 돈을 빌려야 하는 사람들이 그 돈을 어떻게 갚나. 그 염치가 없기 때문에 거기까진 생각도 안 하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그 미소가 그토록 화사한 것이고, 그리고 나는 당신들의 그 화사한 미소가 두렵고 부럽다. 그 염치없음이 부럽고, 그 염치없음이 두렵다. 절대로 돈 꿀 일 없을 사람들이 돈 꾸라고 권할 때의 그 어색함과 함께. 그래, 어쨌거나 댁들은 사채 쓸 일 없다 이거지?

 

글 : 김현진 (칼럼리스트)

출처 : 매거진t (www.magazinet.co.kr)